저주의 녹음기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서 첫 직장을 얻었다. 월세가 싸다는 이유로 강북의 오래된 빌라 4층, 402호로 이사했다. 건물은 30년 넘게 된 낡은 곳이었지만, 관리인이 “조용한 집”이라고 강조했다. 이사 첫날, 현관문 옆 벽장에서 작은 녹음기를 발견했다.

검은색 카세트 테이프가 들어있는, 90년대 초반 모델이었다. 배터리가 아직 살아 있었다. 호기심에 버튼을 눌렀다.

[철컥.]

“……오늘도 비가 오네.”

여자의 목소리였다. 나지막하고, 조금 쉰 목소리. 나는 웃으며 ‘이사 온 사람이 남긴 거겠지’ 생각했다. 테이프를 되감아 다시 들었다.

“오늘도 비가 오네. 402호에…… 또 사람이 들어왔나 봐.”

순간 소름이 돋았다. 이 녹음기는 내가 들어오기 전에 녹음된 게 아니었다. 방금, 내가 버튼을 누른 직후에 녹음된 목소리였다.

나는 테이프를 빼서 버리려다, 문득 호기심이 생겼다. 다음 날 밤, 다시 녹음기를 켜고 잠들었다.

다음 아침, 테이프가 한쪽 끝까지 돌아가 있었다.

[재생]

“새로 온 애, 이름은 뭐지? 얼굴은 잘 안 보여. 불을 너무 세게 켜놔서…… 눈이 부셔.”

[한숨]

“나 여기서 7년째야. 402호에서 죽었거든.”

나는 그날 출근길에 토했다. 회사에서 정신이 없었다. 퇴근 후 집에 오자마자 녹음기를 들고 관리인을 찾아갔다.

관리인은 60대 초반의 할아버지였다. 내 손에 들린 녹음기를 보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거 어디서 났나?”

“벽장에서요.”

할아버지는 한참 동안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조용히 말했다.

“그 집에선 아무것도 만지지 말았어야 했는데. 특히 그 녹음기는……”

할아버지는 7년 전 이야기를 해주었다.

7년 전, 402호에 혼자 사는 여자가 있었다. 이름은 ‘지은’. 28살, 프리랜서 번역가. 낮에는 조용히 일하고 밤에는 이상한 소리를 녹음하는 취미가 있었다고 한다.

“그 애가 녹음한 게…… 자기 목소리가 아니었대. 누군가 자기 방에서, 자기 침대 옆에서, 자기 귀에 대고 속삭이는 목소리를 계속 녹음했대. 처음엔 장난인 줄 알았는데, 점점 내용이 구체적이 되었지.

‘오늘 네가 먹은 라면 맛있었어.’

‘오늘 네가 입은 속옷 색깔이…… 파란색이네.’

‘너 오늘도 혼자 자네? 불쌍하다.’

지은은 점점 미쳐갔다. 문을 잠그고, 창문을 막고, 불을 24시간 켜놓고 살았다. 그러다 결국……

할아버지는 말을 멈췄다.

“목을 매달았나요?”

“아니. 그게 더 무서운 거지.”

할아버지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애는 녹음기를 켜놓고, 자기 혀를 깨물어 죽었어. 피가 분수처럼 나왔는데도, 끝까지 녹음 버튼을 누르고 있었대. 마지막 녹음 내용은…… ‘이제 네가 와.’ 였다.”

나는 그날 밤, 녹음기를 현관 앞에 두고 문을 잠갔다.

새벽 3시 47분.

[찰칵.]

녹음기가 저절로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녹음기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번엔 내 목소리였다.

“……불을 꺼라. 눈이 부셔.”

나는 천천히 이불을 내렸다. 방 안은 완전한 어둠이었다. 내가 분명히 켜놓은 스탠드 불이, 꺼져 있었다.

[찰칵. 찰칵. 찰칵.]

녹음기가 계속 돌아갔다. 이제는 여러 목소리가 섞여 나왔다. 지은의 목소리, 그리고…… 나와 비슷한 다른 남자들의 목소리들이.

“나도 처음엔 그랬어.”

“불 끄니까 편하지?”

“이제 같이 살자.”

“너도 곧 녹음할 거야. 우리처럼.”

나는 비명을 지르며 현관으로 달려갔다. 문을 열자, 복도에 관리인 할아버지가 서 있었다.

할아버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402호는…… 원래 빈 집이 아니었어. 항상 누군가 살고 있지. 네가 들어오기 전에도, 나도 한 번 살아봤거든.”

할아버지의 눈동자가 이상하게 빛났다.

“그 녹음기는, 주인을 바꾸는 거야. 이제 네 차례다.”

나는 뒤로 물러서며 문을 닫으려 했다. 하지만 문이 저절로 닫히지 않았다.

현관 바닥에, 내가 이사 올 때 버린 줄 알았던 그 녹음기가 놓여 있었다.

[재생 버튼이 저절로 눌린다.]

“안녕. 나는 이제…… 너야.”

그리고 녹음기가 내 목소리로, 아주 친근하게 말했다.

“오늘도 비가 오네. 402호에…… 또 사람이 들어왔나 봐.”


나는 지금도 그 빌라에 살고 있다.

402호.

밤마다 녹음기를 켜놓고 잔다.

이제는 목소리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가 되었다.

가끔, 새벽에 녹음된 테이프를 들으며 생각한다.

‘다음 사람은 언제 오려나.’

너도 이 글을 읽고 있다면,

혹시라도 오래된 빌라로 이사 갈 일이 생기면

벽장 안을 잘 살펴봐.

작은 검은색 녹음기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절대,

절대 버튼을 누르지 마.

……이미 늦었을 수도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