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역한 지 2년 좀 넘었는데 본가 내려가다가 산줄기 보이면 가끔 생각남. 내가 복무하던 곳이 화천이랑 양구 사이쯤이었는데 거기 안동리 지나서 유격장으로 이어지는 고개가 하나 있음. 부대에서는 구라 고개라고 불렀는데 경사가 심해서 올라가다 보면 구역질 난다고 그렇게 불렀다.

일병 꺾이고 1월이었을 거임. 0230 근무였는데 날씨가 진짜 미쳤었음. 눈은 안 오는데 바람이 칼 같아서 방한도구 다 껴입고 박 병장이랑 초소로 올라가고 있었다. 박 병장 이 인간 원래 입이 잠시도 안 쉬는데 그날따라 아무 말이 없더라고. 그냥 앞만 보고 벅벅 걸어 올라가길래 나도 숨 차서 뒤만 따라갔지.

고개 중간쯤 갔을 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림. "야 민수야 같이 가."

너무 평범하게 내 이름을 불러서 멈칫했다. 소대 동기 진수 목소리랑 너무 똑같았거든. 근데 진수는 그때 불침번이라 거기 있을 리가 없었음. 내가 고개 돌리려고 하니까 앞에 가던 박 병장이 내 전투조끼 어깨끈을 꽉 움켜쥐더라. 그러고는 뒤도 안 보고 낮게 읊조렸음. "앞만 봐. 대답하지 말고."

박 병장 손이 바들바들 떨리는 게 장갑 너머로 다 느껴지더라. 나도 겁나서 그냥 땅만 보고 걸었다. 근데 분명히 10분이면 통과해야 할 고개인데 걷고 걸어도 끝이 안 나옴. 옆에 세워진 추락 주의 표지판을 벌써 네 번째 지나치고 있었다. 뒤에서는 계속 목소리가 들렸음. 엄마 목소리였다가 친구 목소리로 바뀌더니 나중에는 모르는 여자가 귀 바로 옆에서 숨 몰아쉬면서 "잠깐만 이것 좀 봐봐" 하고 속삭이더라.

박 병장이 내 어깨를 거의 낚아채듯 끌고 올라가서 겨우 초소 불빛이 보임. 원래 15분 컷인데 50분이나 걸렸더라. 초소 교대해주던 애들이 왜 이렇게 늦었냐고 지랄하는데 박 병장은 아무 말도 안 하고 초소 일지만 적고 내려갔음.

다음 날 아침에 행보관이 부르더니 어제 순찰 돌 때 이상한 거 없었냐고 물어봄. 내가 어물거리니까 행보관이 담배 피우면서 그러더라. "거기 옛날부터 여우가 사람 홀린다는 소리 있던 곳인데 요즘도 그러네. 그냥 잊어버려."

나중에 전역하고 박 병장 만나서 술 마시다 물어봤음. 그때 왜 그랬냐고. 박 병장이 소주 마시더니 자기는 그때 내 이름 부르는 소리 못 들었다더라. 대신 자기 바로 뒤에서 누가 계속 군화 끄는 소리를 내면서 따라오길래 내가 장난치는 줄 알고 뒤돌아보려 했대.

근데 그 순간 길바닥에 비친 그림자를 봤는데, 박 병장 자기 그림자 머리 위에 사람 손 같은 게 두 개가 더 얹어져 있었다 함. 그거 보고 뒤돌아보면 진짜 죽겠다 싶어서 나 끌고 뛴 거라고.

그날 초소 안에서 박 병장이랑 찍은 사진이 한 장 있는데, 우리 둘 다 방한 마스크 쓰고 있어서 얼굴은 안 보임. 근데 내 어깨 위에 놓인 박 병장 장갑 낀 손 말고, 내 전투조끼 뒷카라 부분을 꽉 잡고 있는 허연 손가락 세 개가 선명하게 찍혀 있더라.

지금도 가끔 클라우드에서 그 사진 알림 뜬다.